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耘虛堂大宗師(운허당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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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열(李時說,李耘虛, 李學洙, 李時悅)은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고안(高安)면 안흥(安興)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운허(耘虛)이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윤세복(尹世復) 남형우(南亨祐) 김동삼(金東三) 배천택(裵天澤)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 5월 윤세복 이원식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사가 되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했다. 1919년 3 1운동 후 서간도에서 부민단(扶民團)을 확대 개편하여 한족회(韓族會)를 창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기관지인 『한족신보(韓族新報)』의 주필로 활동했다.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토대로 하여 서간도의 독립군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창립할 때 이에 참가하여 적극 활동했다. 이듬해인 1920년부터는 독립운동을 위한 교포신문인 『효월신문(曉月新聞)』의 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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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2월 현정경(玄正卿) 현익철(玄益哲) 장명환(張明煥) 김관성(金觀聲) 등 4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 단체인 광한단(光韓團, 일명 義興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에 선임되었다. 광한단은 국내에 들어와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식민지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9년 3월 만주의 3대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가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할 때 이에 간부로 참가했으며, 국민부의 정치조직으로 1931년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조직되자 그 중앙집행위원 겸 교육부장을 맡았고, 또한 조선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간부로서도 활동했다. 일제의 만주침략 후인 1932년 2월에는 조선혁명군이 양세봉(梁世奉)의 지휘하에 만주인 의용군 이춘륜(李春潤) 등과 합작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편성하고 작전한 3월의 신빈(新賓) 전투에 참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부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