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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을미사변의 국제관계사 47 해군 제독이 고종을 알현함으로써 일본 정부는 무력 을 통해 한러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 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가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준비하 면서 열강의 간섭 가능성을 낮게 보았던 이유는 영 국과 독일, 특히 후자가 가담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 했기 때문이다.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이전까지 독일 과 일본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독일의 반대가 예상되더라도 상업 문제에 국한될 것으로 일 본은 전망했다. 간섭 이틀 전까지 외상 무쓰 무네미 쓰[陸奥 宗光]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상업 관련 조항 들이 독일에게 일본만큼이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 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이는 일본이 고립된 러시 아가 일방적인 간섭을 감행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 결과, 간섭 3국에서 독일의 배제는 일본 단독으로 러시아에 저항할 수 있는 환 경을 조성하였다. 러시아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알렉세예프 제독 은 일본이 요동반도 철병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중국 산동반도의 치푸(芝罘 )를 출발 (1895.7.20), 뤼순(旅順) 따렌(大連)을 거쳐 7월 25일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제독은 서울 방문을 통해 한 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체감하고 조선의 현 황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기회를 갖고자 하였다 . 제 독의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조선에서 이룬 결과 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비측의 방해 공작을 제거할 수단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례로 일본이 왕 비 시해를 도모했던 박영효의 도피 지원을 거론했 다. 이는 상대적으로 러시아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 성하여 주한공사 베베르에 대한 고종의 신뢰가 두텁 다고 보고했다. 7월 25일 밤 알렉세예프 제독을 방문한 조선군 장 교들이 고종의 환영 인사와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제독은 베베르 공사의 권유에 따라 고종을 알현함으 로써 예정보다 12시간 이상 서울에 머물렀다. 1895 년 7월 27일 오전 11시 고종은 4명의 수행 장교를 거느리고 매우 신중한 태도로 제독을 접견했다. 고 종은 러시아 차르의 우정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며, 현재와 같이 어려운 시기에 러시아 공사를 신뢰하여 그를 최고 자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했 다. 알렉세예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베베르는 이 말 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군상 에게 타전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9월 1일 군인 출 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가 주조선 공사로 부임 했다. 그 결과 을미사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필자 최덕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양대학교 등 강사와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을 지냈으며,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연 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정부지원 연구프로젝트 “러일 정보전쟁과 코리아 휴민트”, “근대한반도 지정학적 상상력의 진화 – 동아시아, 유라시아 그리고 글로벌 질 서  속으로”를 수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대한제국 국제관계사 연구』(동북아역사재단, 2021),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러시아문서』(동북아역사재단, 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