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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의용군의 활동과 만주(중국 동북) 진출 47 1942년 7월 중국 화북(華北)지역의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화북조선청 년연합회 제2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서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김 원봉 최측근인 김두봉(金枓奉)을 독 립동맹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회의에 서는 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 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하기로 하였 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관내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 고, 일제 패망 후 추방당할 위기에 놓 여 있었던 만주(중국 동북) 조선인 보 호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 조선의용군  활동의 결과로 ‘연변조선족 자치주’ 가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용군 후신부대가 한반도의 동족상잔 이기도 한 6·25전쟁의 한 당사자가  되었던 것은 어두운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용대의 조선의용군으로의 개편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일본군은 중국 화북(華北)의 진동 남(晉東南,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으로 중국공산당이 이끌던 팔로군(八路軍)은 이름 높았던 참모장 좌권(左權) 장군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팔로군과 함께 활동 하였던 조선의용대도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군의 이른 바 ‘소탕전’ 가 운데, 조선의용대의 정신적 지주이자 김원봉의 최측근인 윤세주(尹世 胄), 역시 최고위급 간부인 진광화(陳光華)가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소탕전’이 끝나고 태항산 지구에 포성이 멈춘 1942년 7월, 그곳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이하 ‘조청’으로 약칭) 제2차 대회가 개 최되었다. 대회에서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화북조선독립동맹(이하 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머나먼 충칭(重慶)에서 찾아온 한글학자이자 김원봉의 최측근인 김두봉(金枓奉)을 독립동맹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하 였다. 조청이 독립동맹으로, 조선의용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직후 화 북의 정세는 한국 독립운동에 매우 유리한 국면으로 돌아섰다. 1942년 6월 태평양의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군은 미군에게 대패하여 제해권 을 상실하였다. 이후 일본은 화북의 일본군 절반을 태평양·동남아 전선 으로 이동시켰다. 이제 중국 팔로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였고, 조 선인 부대에게도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에 화북의 조선 독립운동 진영은 독립동맹의 이름으로 민중공작에 힘을 더 기울였다. 즉 베이징(北京)·텐진(天津) 같은 도시 지역, 그리고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기동(冀東, 하북성 동부)의 농촌지대 등에 독립동맹의 분맹(分盟)을 건립하고 이를 통해 다시 세력을 확대시 켜 나갔다. 나아가 만주(중국 동북)와 국내까지 활동 무대로 삼았다.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비약적 발전 ➀ 중국 화북지구 활동 중국 화북의 경우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이주해온 조선인들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