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page

Special Theme • 희산 김승학의 《독립신문》 발간과 『한국독립사』 편찬 전말 47 《독립신문》은 1919년 8월 21자로  중국 상해(上海)에서 《독립》이라는  제호(題號)로 창간되었다. 이 신문 은 임시정부의 연통제 경로를 통해   국내에 전달되어 정부수립 사실과  각종 독립운동 소식을 전파하였다.  1922년 7월 중순부터 중문판(中文 版)을 간행했는데, 이는 중국인들 에게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정당성 과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선전활동 의 일환이었다.  제작·발송비 등 자 금은 백광운(본명 채찬)·장기초 등  남만주 독립군 동지들과 통의부 계 열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김승학 이 광복이후 가장 심혈을 쏟은 부분 은 독립운동사 편찬이었다.『한국독 립사』는 『한국통사』(박은식, 1915) 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1920)의 맥을 잇는 업적으로 평가 된다.  마차 2대, 인력거 20대 그리고 빈 건물 1채 - 28번의 피신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1881-1964)은 1921년 중반 폐간 위기에 처한 《독립신문》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권유에 따라 3년여 동 안 70여 호의 신문을 발간하였다. 김승학이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 단 체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의 참의장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독립신문》의 간행을 책임졌던 사실은 그리 자세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광복 후에 그가 환국 속간 《독립신문》을 발간 한 것이나, 『한국독립사』를 간행한 것도 그의 이러한 경력과 무관치 않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로 알려진 《독립신문》은 1919년 8월 21 자로 중국 상해(上海)에서 《독립》이라는 제호(題號)로 창간되었다. 임시 정부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고 국내에 특파원 을 파견하여 국내와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었다. 신문은 이러한 경로로 국내에 전달되어 정부수립 사실과 각종 독립운동 소 식을 전파하였다. 초기의 《독립신 문》은 사장 겸 주 필(편집국장) 이 광수, 영업부장 이영렬, 출판부 장 주요한의 진용 으로 운영되면서 조동호·차리석·김 여제 등이 기자로 참여하였다. 재정 은 임시정부의 지 원금과 개인의 출 연금, 미주 대한 임시정부 활동상과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동향을 널리 알린  상해 《독립신문》 창간호(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