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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구고보(大邱高普)·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학교) 학생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연합시위를 전개하도록 약속하였다. 3월 6일에는 김태련 등에 의해서 이갑성이 보낸 독립선언서가 등사되고, 대·소의 태극기 40여매가 제작되는 등 사전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불행히도 그는 이튿날 일제의 예비 검속 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가 주동하여 계획한 독립만세운동은 예정대로 추진되어,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그는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