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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를 전개시켜 오던 우리 민족이 일제 침략으로 국권을 탈취당하여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일제의 식민지화 하면서 자유가 박탈되고 문화가 파괴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무단통치와 헌병 경찰의 지독한 강압은 날로 더욱 심해졌다. 그 같은 고난 속에서도 자유창조 개혁정신의 민족적 맥락을 계승해온 우리 민족은 굽히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한 국권회복운동을 꾸준하게 전개하여왔다. 특히 1차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라는 시대의 진운에 맞추어 1919년에는 거족적인 3.1운동을 일으켰으며 민족의 염원인 국권회복을 위한 국내외 동포의 독립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이때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도 모두 나가서 대한독립만세의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원곡면에서는 4월 1일을 기하여 밤 8시경 면사무소앞에 1,0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무르면서 사람마다 등불과 횃불을 들고 양성면쪽으로 야간행진을 하였는데 마침 양성면에서도 이미 독립만세를 부르던 군중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에 더울 위세를 얻은 군중들은 조국의 광복을 부르짖으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우리 민족은 반드시 국권을 회복하여야 된다고 결심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보여주었으며 일제 침략기관을 없애야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시위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며 야만적으로 탄압 살상을 하였다. 그렇지만 면민들은 민족혼으로 뭉쳐 격렬하게 대항하면서 일경주재소와 우편소 등 식민통치기관을 파과하는 등 3.1운동이 전개되는 중에 가장 처절한 충돌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면민 중에는 피살 순국되거나 체포 구금되어 고문 치사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까지 연행 옥사되는 등 귀중한 생명을 희생당하였다. 옥고를 치룬 분도 132인이나 되는데 12년 형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이토록 숭고한 애국선열의 자유독립정신을 영원히 계승하여 자손만대에 기리고자 면민들이 정성을 모아 유서깊은 이곳에 기념탑을 세우게 되었다. 1983년 광복절 이현종 문학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글 짓고 연봉 장은봉 글씨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