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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차 20세 되던 1944년 가을 일제가 실시한 징병제에 의해 일본군에 강제 입대하게 되었다.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일본 황국은 중국의 전시 수도였던 중경 공략을 목표로 사실상 중일전쟁의 판가름이 될 지강대회전을 위해 호남성 장사 형산 형양을 중심으로 중국 방면 군의 대병력을 집결 중이었다. 선생은 중국의 북부 및 중부지방에서 수개월에 걸친 소정의 군사교육을 마치고 이 대회전을 위해 집결 중인 일본군에 배속되었다. 이상과 같은 상황하에서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한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망명의 뜻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서 1944년 12월 중국 호남성 호담지구에서 미리 공작한 강대열 정대윤 동지 등과 함께 많은 고난을 겪은 후 구사일생으로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에 망명했다. 이것은 용기와 결단력이 없이는 감행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후 선생 일행은 1945년 2월 중경에 있던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재중경 우리 교민에 대한 생명 자산의 보호와 민사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장차 우리 국군의 기간 요원을 목표로 한 교육 훈련과 한중 친선을 위한 정훈 활동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 후 1951년 9월부터 경찰에 복무하다가 1960년 3월 대구중부경찰서에서 퇴직하였다. 그후 가사를 돌보시고 4남매를 대학 졸업 출가시키셨으며 광복회 이사로도 봉사하셨으나 말년에 중병을 얻어 1998년 9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