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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이상재는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참여하면서 홍영식, 김옥균등과 교분을 맺고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1984년에는 우정국 총판인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였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1887년에는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하는 박정양을 따라 2등서기관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곧 사임 후 낙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에는 학부대신 박정양의 추천으로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학교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6년 7월 서재필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여 부회장을 역임하고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설,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의 운동을 펼쳤다. 1927년 3월 29일 78세의 일기로 재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장례식은 4월 7일에 전국 420개 단체가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뤄졌으며, 한산 선영에 모셨다. 이후 1957년 현 묘소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