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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역임하셨고 더욱이 경북노회 공로 목사로 추대되어 후진들의 신앙 정절과 지도 육성에 진력하셨고 서거 당시에 장례식은 경북노회장으로 추모와 애도 속에서 엄숙히 거행하시다. 생존 당시 항일 투쟁은 은밀하게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것과 독립투사들을 직접 상봉하고 적극 협력하는 것을 불식하였음으로 항시 왜경에게 심문 취조를 당했고 또 영해 영덕 등지에서 투쟁한 동지 160명의 선두에 주동자로서 옥고 중에는 기갈이 극심하여 구면이 비틀어졌고 2춘 2하 2추 1동 동안 사경의 위기까지 욕보았으나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해방)시까지 25년간 왜경과 투쟁하고 17차례나 구속 감금되시다. 60 자친을 두고 떠난 몸이 불효막심하여 불언가상으로 세월을 보내시다. 형기를 마치시고 귀가한 즉 가사 형편없이 빈한하나 자친의 진갑에 신구예식 헌수로 자친에게 위안의 정성을 다하시다. 곤궁한 중에도 신학교 수학. 학우회장 피선. 졸업 후에는 줄곧 영해 원황교회를 위시하여 기독교 영덕연합회장. 문경 예천 지방 각 교회당 회장, 경안노회 동편 시찰장. 경안노회장 2회. 추대재단 이사장.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지품면 협의위원장. 영덕군 지품면 민총 선거로 면장 피선. 경동노회장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재판국장.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공천부장. 대한예수교장 노회총회 신학교 이사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51회 부회장 등을 역임함과 동시 90 평생을 성직에 봉직하면서 불변 보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WCC와 에큐메니갈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좌경으로 기울어질 때 경북노회장으로 보수 구국에 끼친 공로가 지대하여 경박노회에서 공로 목사와 총회 평생 총대로 추재하였으며 또한 독립유공자로서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과 훈장을 수상하시다. 말년에는 평생 신앙의 정절을 고수하셨으며 한국교회 선교 70주년 희년 설교집과 3.1절 독립투쟁사로 인하여 미국 푸로리다주 홈스테드 성서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시다. 고인은 말없이 잠들었으나 고인의 유지인 한국교회 발전과 조국애와 청렴정직하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인하고도 숭고한 신앙 정절은 후세인들의 가슴 깊이 남아 고인의 뜻이 길이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