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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포사건(鵄河浦事件) : 1896년 3월 9일 백범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타살한 사건. 김구는 1896년 3월 8일 평남 용강군(龍岡郡)에서 배를 타고 인접한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치하포(鵄河浦)로 가서 이화보(李化甫)가 운용하는 여점(旅店)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마침 같은 여점에 있던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다음 날인 3월 9일 새벽 3시 경에 살해하였는데, 이것이 치하포사건이다. 무역상인 또는 약장사[賣藥商人]로도 언급되는 스치다를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중위로 판단한 김구는 그를 타살했다는 포고문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치하포사건이 일어난 3월 9일 당일, 스치다를 수행했던 조선인 통역 임학길(林學吉)이 평양으로 도피하여 그 곳에 있던 일본 경성영사관 경부(警部) 히라하라 아쓰무[平原篤武]에게 신고하였다. 이에 히라하라는 3월 15일 치하포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지방관에게 범인의 체포를 의뢰하였고, 일본영사관도 외부(外部)에 신속한 범인 체포를 촉구하였다. 그 결과 안악군 보고를 토대로 해주부는 범인이 김창수(金昌洙)주 01)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인 조선 정부의 입장에 따라 김구의 체포는 몇 달 동안 지연되었다. 이에 일본영사관은 6월 5일부터 27일 사이에 3명의 순사를 평양 지역에 파견하여 사건 조사를 실시하였다. 결국 피신 중이던 김구는 6월 말 해주부에서 체포되었다. 해주부에서는 곧바로 심문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일본영사관은 인천항재판소에 치하포사건은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되는 사건이므로 외국인 관련 재판을 담당하는 인천감리서에서 심문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조회하였고, 그 내용을 인천항재판소가 외부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해주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김구는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이곳에서 8월 31일, 9월 5일, 9월 10일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인이 배석하는 합동 신문을 받게 되었다. 3차례의 진술[공초(供招)]에서 김구는 스치다 살해 동기와 살해 방법을 밝혔는데, 동기는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며, 방법은 발로 차 마당에 쓰러뜨리니 그가 칼을 뽑기에 돌로 쳐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영사 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9월 12일 ‘대명률(大明律)의 인명모살인죄(人命謀殺人罪)’로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10월 22일 법부는 김구에 대한 교형(絞刑)을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이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옥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898년 3월 19일 탈옥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아버지가 대신해서 수감되었다가 그로부터 1년 후인 이듬해 3월 석방되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