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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의 참상. 이야포 미군폭격기학살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이야포 피난민 미군기 폭격학살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은 이 땅에서 전쟁없는 평화가 후대 영원토록 지속되길 소원하며 증언합니다.
일제강점기 우리가족은 평안북도 용천군에 살았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삼팔선이 남북을 갈라놓았습니다. 우리 가족 일곱 식구는 월남해 서울 염리동에 터를 잡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북한 인민군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우리가족은 부산진구 성남국민학교 서울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정부는 몰려드는 피난민들을 분산 수용하고자 서울피난민수용소 사람들을 인근 도서지방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우리가족도 정부에서 징발한 배를 타고 통영과 욕지도를 거쳐 또 다시 거문도로 향해 이동했습니다. 피난선이 남면 안도 이야포 해상을 지날 때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야포 곶머리에서 해상 감시하고 있던 경찰의 정박명령이었습니다. 피난선은 이야포 해안에 정박하여 경찰 검문을 기다렸습니다. 1950년 8월 2일 오후였습니다. 다음날인 8월 3일 아침, 피난민들은 안도주민들이 마련해준 주먹밥을 먹고 경찰 검문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피난선에 나타난 것은 경찰이 아니라 미군폭격기 4대였습니다. 피난민들은 미군폭격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전폭기는 태극기가 펄럭이는 피난선을 향해 무차별 기관총을 쏱아 부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피난선은 죽음의 도가니로 변했습니다. 아버지와 여동생도 기관총을 맞고 바다에 떨어져 숨졌습니다. 당시 열여섯이었던 나 이춘혁과 동생 이춘송, 누이 세살배기 남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있던 어머니는 살아났습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폭격을 맞은 피난선에서는 또다시 절규가 이어났습니다. 미군폭격기가 다시 2차 기관총을 난사했습니다. 피난민들은 살기위해 바다에 뛰어들었고, 나도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나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내등을 떠밀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안도주민들은 피난민을 구히기 위해 전마선을 띄웠습니다. 남동생을 업은 어머니는 전마선을 타고 오다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삼남매는 산속에서 엿새 동안 숨어 지내야했습니다. 그 사이 미군기들이 또다시 나타나 돌산도 앞 두룩여 해상에서 조업하던 어민들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이야포에 이어 미군이 자행한 두룩여와 여자만 폭격이 그것입니다. 피난선에서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이야포 건너편 연도로 이동시키는 날 피난선은 불타올랐습니다. 기름을 끼얹은 피난선에서 원통한 수많은 죽음도 불살랐습니다. 삼일 밤낮 불탄 피난선은 수장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피난민이 죽거나 부상당한 이야표 학살은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 노근리 피난민 미군학살사건이 난지 일주일 뒤에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나 오폭이 아닌 '미군기 피난민학살사건'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71년이라는 원통한 세월이 '묵종'속에 흘러왔습니다. 그러나 피난선은 수장시켰어도 학살진상마져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학살 목격자인 안도주민들과 이사연씨의 용기있는 증언이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내 나이 90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원통하게 숨져간 수많은 피난민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는 학살의 주체인 미국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합니다. 그리고 이 따에 다시는 전쟁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제가 겪었던 불행한 시대를 여기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2021년 8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