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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연은 경북 봉화(奉化) 출신으로 안동에서 살았으며, 벼슬은 참봉(參奉)이었다. 그의 고향 안동은 1차 의병운동 당시 경상도 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지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안동 일대의 유림들 간에 통문(通文)이 돌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안동통문(安東通文)은 안동군의 유학자 곽종석(郭鍾錫) 도사 김도화(都事 金道和) 지평 김흥락(持平 金興洛) 권진연(權晋淵) 강 육(姜 ) 등의 명의로 을미년 12월에 유포되었다. 그리고 예안통문(禮安通文)은 유생 이만응(李晩應) 금봉술(琴鳳述) 목사 이만윤(牧使 李晩允) 진사 김수현(進士 金壽鉉) 승지 이중봉(承旨 李中鳳)의 명의로 을미년 12월에 유포되었다. 이리하여 안동의 의병은 음력으로 12월 초3일 즉 건양 원년 1월 17일에 수백 명의 의병이 모여서 안동의 관찰사부(觀察使府)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으니,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달아났다. 지평(持平) 김흥락(金興洛)과 도정 유지호(都正 柳止浩)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 참모진에서는 권세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상오(李尙五)를 좌익장(左翼將)으로 임명하는 등 부서를 정하니 진용이 차츰 정비되었다. 이에 권세연은 격문을 각처 의병과 각 지방으로 보내어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인심을 격려 고무하였다. 이 격문에서도,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개화 내각의 제대신(諸大臣)들에 대한 증오심이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이러한 적개심·증오감은 의병진에 앞장섰던 사람에게만 국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어디에서나 의병의 깃발이 날리는 곳에는 많은 민중들이 여기에 호응하고, 생명과 재산을 아끼지 않으면서 지원, 협력하였던 것으로서, 안동 지방의 의병 세력 역시 거의(擧義) 후 10여일 간에 그 수효가 4만 명에 이르렀다고 서울에 알려지게 까지 되었다. 1896년 1월 7일 격문을 사방에 유포하자 안동을 비롯한 예안(禮安)의 이만응(李晩應)·영양(英陽)의 조승기(趙承基)·문경(聞慶)의 이강년(李康·)·유시연(柳時淵)·김도화(金道和)·김도현(金道鉉) 등 각지의 의병장들이 상호 긴밀한 연결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안동 창의 대장 권세연의 명망이 일찍이 그 일대에서 높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의병의 봉기가 어느 곳에서나 대개 그러하였던 것처럼, 안동 의병 역시 쌓인 울분과 치미는 적개심에 의하여 일어났을 뿐, 훈련 없는 군사들이요, 또 대의명분만 내세우던 유림의 인사들이 영도하였던 만큼 치밀한 작전 계획 등이 짜여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1896년 1월 28일에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이 지방과 서울의 많은 관군과 함께 갑자기 쳐들어오니, 의병진에서는 항전을 시도하여 보았지만 훈련된 관군의 계획적인 공격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이리하여 형세가 기울어지자 대장 권세연은 최후까지 싸워서 한 몸을 바치려 하였으나, 참모들의 간곡한 권고에 의하여 몸을 피하였으며, 1월 29일에 읍내가 관군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입성한 관군과 김석중은 경내 유림 인사들의 집을 수색하고 방화하는 등 분풀이를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종의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젯밤에 관찰사 김석중이 많은 관병들을 거느리고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새로 일으킨 의병들로서는 당적하기 어려워 모두 도망해 흩어지자, 관병들이 각처의 의병들을 일으킨 집들에 불을 질러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위의 글은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이 아직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의 의병대에 속하기 전에 안동 의진의 세력이 장대하다는 소식을 듣고 합세하러 가다가 동리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말이다. 그래서 이춘영은 다시 영춘(永春)을 거쳐 영월로 가서 의암을 뵙고 주장(主將)이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안동 의진은 처음부터 무참히 패배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 일이 기폭제가 되어서 당시 유림에서 이름이 높았던 의암이 손수 의진의 총수가 되어 그를 따르던 많은 유림 인사들이 거사에 참여하였다. 이에 안동 의진에 속하였던 의사(義士)들도 정의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여기 저기서 모이고 연락하여 다시금 토역복수(討逆復·)를 위한 재거의 결의와 준비를 굳건히 하였다. 즉, 김도현(金道鉉)·유시연(柳時淵) 등은 안동 의진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준비를 계속 진행하여, 안동 봉기 후 1개월 만인 2월 17일 안동 청량산(淸凉山)에서 새로이 거의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이들은 안동 뿐 아니라 영주(榮州)·봉화(奉化)·의성(義城)·청송(靑松) 등지에서 일군(日軍)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戰果)를 올리고 경상도 동북부 일대를 의병진이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은 권세연의 직접적인 공로로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영향력 하에 성장한 사람들의 활약상이므로 이들을 통하여 그의 간접적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권세연은 당시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안동 의거 이후 무력투쟁을 계속한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유림을 통하여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64세를 일기로 타계(他界)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