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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극열사 및 독립운동가 • 47 상해(上海)에서 우선 선생은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을 설치하는 한편, 통일당을 조직하 고, 그 이념으로 삼본주의(三本主義)를 채택하였다 즉 삼본주의(二本主義)란, l. 민본(야木) 정치의 실현, 2. 노본(勞本)경제의 조직, 3. 인본(人本)문화의 건설로써 선생의 정치 · 경 제 · 문화에 걸친 시-상이었다 이런 중에서 선생의 상해에서 의 첫 번째 적극적인 활동은 미국의원단의 동양시찰을 계 기로 한 박재혁(朴在麻) 의사의 밀피-였다 선생의 명을 받들고 국내에 잠입한 박 의사는 부산경찰서를 폭파하는 장거를 이루었으니, 이는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의열(義烈)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 이다. 상해에서 있었던 선생의 활약은 실로 눈부신 것으로, 모든 독립 운동의 노선을 하나로 통일하여 오직 통합된 힘으로 일제와 대항하는 것이 선생의 방략이 었다. 당시 상해에는 임시정부를 비롯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있었으나 독립을 꾀하기 위한 이들의 방략은 제각기 달랐다 독립운동가들의 노선이 제각기 다른 만큼 조국을 광복하는 데 많은 난관이 있었고, 큰 힘을 모아 일제를 물리치기가 불가능 했던 것이다. 속경 의 군사통일회의 상해의 국민대표자회의 둥은 모두 선생의 독립운동 단일화를 위한 노력 (勞力)이었다. 1923년 1월 3일 개막된 국민대표회의는 우리 독립운동사상 획기적인 신 기원으로 내외 각 지방 단체의 대표 140여인이 모여 개막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선생은 부의징-과 내무를 맡아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와 같은 활동영역은 상해에서 북경 만주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만주에서의 선생의 활 동은 각지 에 산재한 독립군 지도자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당시 만주에는 참의(參講) . 정의(正義) . 신민부(新民府)의 심-부(三府)가 성립되었고,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나름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방향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 었다. 이에 선생은 신민부(新民府)의 전권대표가 되어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노선을 단일화 하기 에 힘썼다. 그리하여 선생은 북만 각지의 독립운동가 들을 소집 하여 삼본주의(三겨" ..l:: 義)에 입각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으며 한족자치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선생은 전 시체제 히-의 한국독립군을 결성하여 참모장으로 활약하는 등 독립운동사상의 실질적인 핵 심인물이 되었다 이와 같은 선생의 조국광복을 위한 초지일관한 수많은 활동은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 이하기까지 끊이지 않았고, 그 저럭 또한 젊 어서나 노년이 되어서나 한결 같았다. 선생과 같이 자신의 한 평생을 수많은 고난을 겼어가며 오직 불굴의 의지로 조국과 민 족을 위해 힘쓴 분은 드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