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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형을 선고받고 두분은 즉각 이에 불복하고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하여 재판석상에서 우리는 대한국민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부르는 것은 극히 당연하거늘 일본인은 외국인이라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없으니 우리를 석방하라고 재판석을 바라보고 호령하여 재판관과 취재기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출감 후 김사국 선생은 향리에서 서당을 열어 후진을 기르시다 72세에 돌아가셨고 강영국 선생은 안식교에 입교하여 정전리에 안식교회를 세우는 한편 사립학원을 병설하여 후진교육에 전념하시다가 68세에 돌아가셨는데 두분 선생이 끝까지 왜정에 비협조로 일관하셨으며 불우한 아동에게 교육을 시켜 애국정신을 가르치려고 왜경의 탄압에도 끝까지 맞섰다. 이명종 선생(경주인)은 서울 출생으로 일본에서 홍료대학을 졸업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다 왜경에 탐문되어 죽림리로 피신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항일운동은 불과 같아서 3.1운동 당시 박원식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경천시장과 옹암포 선착장에 부착하고 장날을 기해 군중들에게 배포선동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4월 28일 공주재판소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감 후 선생의 피끓는 애국심은 일본의 한민족 말살정책에 항거 제2세 교육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죽림제일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셨다. 광복 후 5.10선거에는 선거위원장으로 입헌민주국가를 세우는데 백의종군 하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반공투사로 활약하시다가 59세에 돌아가셨다. 선생님들이 가신 지 수십년에 이분들의 높으신 애국심은 조국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늦게나마 김사국 선생과 강영국 선생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이명종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장하셔라. 세 분 선생님의 위공이시어. 선생님들의 애국애족의 위대한 공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