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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엽 선생은 관산에서 대대로 내려온 양반의 집으로 문학과 행실로 유명했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선비를 찾아다니다가 송사 기우만과 깊게 교제하였다. 한 번은 '사교도가 바른 도덕을 능멸히 여기는 것'을 보고 수판으로 때렸는데 후에 그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이 일로 혐의를 받게 되어 송사에게로 피신하여 몇 해를 산 일도 있었다.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1906년 의제 정석면과 함께 의거하였으며, 각 의진을 출입하면서 계책을 일러주고 협조하였다. 이 때 신창영이 복흥 산중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군율이 엄정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달려갔다. 신창영은 김영엽의 능력을 인정하고 군사 반을 선뜻 떼어 주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06년 성재 기삼연이 적에게 체포되고, 다시 그의 의진이 김공삼·박도경에 의해 수습되어 다른 의진과의 연합 전선을 도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사를 이끌고 가서 합진하여 적과 대전하였다. 그 후 전해산의 의진과 합진하여 대치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였다. 대치 전투는 제 의진들과 연합하여 치른 것으로서, 이 전투에는 전해산·김영엽 의진뿐 아니라 홍재도·신창학·심남일의 의진도 참가하였다. 그 후 자은촌에서 적과 교전하고 전해산 의진과 분진하였다. 1908년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여 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심남일 의진에 입진하여 장흥·강진 등에서 왜적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의진과의 연합전선을 전개하고 이합을 되풀이하는 동안 다른 의병장과는 의기투합할 수 있었으나 유독 유종여와는 대민관계에서 의견 차가 크게 벌어졌다. 끝내 유종여가 하수인 황운룡·정섬을 시켜서 1909년 2월 12일 장성 운문암에 유진하고 있던 김영엽을 암살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김공삼과 박도경이 호군장 손형을 시켜서 하수인을 잡아 총살시켰으나 유종여는 그 후 행방을 감춰 알 수 없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