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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건립문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해 후미진 골짜기만 찾아드는데 해는 치우침을 싫어해 중천에서 비추인다." (님이 17세에 지은 시) 1885년 8월 4일(음력)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난 님은 어려수벝 유학을 배워 선비의 서슬 푸른 의리 정신을 몸에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구국의 한마음으로 서울로 올라가 보성전문, 양정의숙에서 경제학을 배웠다. 이때 교남 교육회를 만들어 의령을 비롯하여 영남 각지에 학교를 설립, 민족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나아가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격동된 서른 살 안쪽 청년 8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기어코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 밖으로 떠나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민족해방운동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4년 가을께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창립하고, 장차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돋움케 하였다. 이로써 민족자본을 육성하는 한편 국외의 독립군 단체에 군자금을 보냈으며 나라 안팎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 사이의 연락 거점노릇을 하였다. 그리하여 3.1운동의 전민족적 봉기를 준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건을 지원하고 스스로 연통제의 동맥이 되어 그 기관지 《독립신문》의 국내 보급통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기미육영회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국외 유학의 길을 터주고, 부산청년회를 만들어 지역 사회 운동의 터를 닦았다. 1927년에는 민중 생활 방위, 민중에 의한 산업 관리를 목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를 위해 잡지 《자력》을 발간하였다. 일찍이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던 님은 1929년에 중외 일보사를 경영하여 민족언론수호에 진력하였다. 한편, 님은 1927년에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힘을 모아 신간회를 결성하자 이를 지지하고, 영남의 유림 지주들이 영남친목회를 결성하려 하자 그것이 지역 감정을 불러일으켜 신간회로 민족 역량을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여 분쇄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가 첨예한 항일 투쟁의 무대가 되자 발해의 옛 수도 동경성으로 들어가 드넓은 땅을 개간하여 발해 농장이라 이름짓고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했으며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이로써 동포 이주민의 생활을 안정시킴과 함께 항일투쟁의 경제적 비반을 쌓고 민족교육을 베풀고, 태종교를 민족 정신의 고갱이로 삼아 이곳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육성하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민족해방의 불씨를 지펴 나가던 님은 일제 경찰의 손아귀에 붙들려 이홉달 동안 모진 고문과 옥살이에 시달리다가, "집안일이든 나라 일이든 오직 자력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채 1943년 9월 2일(음력 8월 3일) 쉰 아홉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일제에 맞선 투쟁에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나아가 비타협 절대 독립의 독립전쟁 노선을 굳게 관철해 나간 님의 의리 정신, 민족의 협동 단결로 민족 해방을 달성하고 민중의 협동 단결로 민중경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님의 협동정신, 자력을 중심으로 민족자주독립, 민족자립경제 건설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님의 자력정신을 이어받아 올곧은 부산정신, 민족정신으로 뻗어 내리게 하고자 이 곳에 님의 흉상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