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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섭(尹琦燮)은 경기 장단(長湍) 사람이다. 1908년 안창호(安昌浩)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민단의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하였다. 1920년 상해에서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과, 임시정부군무부(臨時政府軍務部), 임시편집위원장(臨時編輯委員長), 상해거류민단(上海居留民團) 본구역의 위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1년 5월 중한국민호조사총사(中韓國民互助社總社)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협성회(協成會)에 가입하였으며, 우리말 사용의 장려를 위한 연설회와 강연회를 통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즉 "일본에 의해 우리말이 전멸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던중의 여가에는 반드시 우리말을 익히도록 하라"는 요지의 강연을 7월 5일부터 시작하여 8월말까지 실시하였다. 1921년 11월 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연서로 독립청원을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1923년 5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해에서 조직된 협성회(協成會)의 단장으로 단원 150명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1924년 2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독립운동의 추진책을 강구하였고, 1926년 12월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원(國務員)에 선임되어 1935년까지 군무장(軍務長)등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3월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혁명을 완수한다는 목적하에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4년 2월 한국혁명당 대표로 민족단체의 합류를 추진하여 1935년 7월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였고,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의 당보부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3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