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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영희는 1919년 3·1운동 때 학생대표로서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 2월 20일경 동교 선배인 한위건(韓偉健)을 만나 만세운동 방법을 논의하였고, 김형기(金炯璣) 등 선배와 함께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로 학생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 사전 약속대로 탑골공원으로 나갔다.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등 다수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이 갑자기 장소를 변경하여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을 하자, 그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누군가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그들은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이후 일경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어 약 8개월여의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 90일 通算)을 받았다. 출옥 후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한 그는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23년 배재고보에 편입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지력과(地歷科)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배재와 경신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한편 1938년경부터는 인천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