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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연마하는 봉황각 49일 수련과정을 3회에 걸쳐 이수하며 독립운동의 신명을 바칠 굳은 결심과 함께 전가산을 매각한 200원을 구국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에 헌납하니 선생의 구국 애족정신은 세인의 추앙을 받는 선각자로서 지도적 위상을 정립하시니 노심초사 구국일념이요 일구월심 항일투혼을 바칠 기회를 도고하다 1919년 신춘 거족적으로 전개된 3.1독립운동을 기점으로 춘천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할 계획으로 이준용 박순교 지사와 함께 동면 만천리 천도교 인근 정씨 묘막에서 거사를 모의 3월 10일부터 14일까지 각읍면을 순회하며 민족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설득하여 시위군중을 규합하다 일제헌병에게 체포되니 이때 연루된 지사가 허기훈 허기준 안동식 차상덕 허현 등이었다.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시작으로 복심법원의 항소기각으로 형확정까지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으니 목불인견의 참상은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고문에도 선생의 초지일관된 민족자존의 항변은 대한남아의 기개를 드높인 민족혼이라 옥고를 마친 후 선생은 1921년 3월부터 많은 천도교도와 애국인사들의 존경속에 은밀히 청년과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일깨우는 애국계몽교육에 여생을 바치다 1930년 12월 23일 천추의 한인 조국광복을 못 보시고 타계하니 향년 70이라. 선생의 숭고한 유지와 그 발자취는 후세에 면면히 이어저 광복이 오는 날까지 독립을 위한 각계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으로 승화되었으니 감히 선생의 영전에 머리 숙여 민족정신의 지표를 깨닫게 하시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높이 기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다. 유족으로 초취는 해주오씨로 무후이며 배위는 달성서씨로 장자 일모와 차자 종모이며 장손 문희와 용기 용선 용훈 용희 용봉 용근 용채라. 증손은 상구 영구 성구로 자손이 번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