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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구 3 · 1운동의 전개 양상과 특징 45 헌은 3월 8일 만세 운동과 관련해 157 명을 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67명을 재판 에 넘겼다. 한편, 3월 8일 대구농림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 에 참가하기 위하여 교문을 나섰지만 저 지당해 기숙사에 감금되어 있었다. 3월 10일 덕산동 동문시장에서 2차 만세시위가 펼쳐지다 1919년 3월 10일 덕산동 동문시장에서 3월 8일에 이은 2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8일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3월 9일에도 학교와 달성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려 했으나, 일본 관헌의 방해로 뜻 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박남준(朴南俊)·김재소(金在炤)와 계성학교 학 생 박태현(朴泰鉉)·박성용(朴聖容) 등이 일반인 김재 병(金在炳)·이덕주(李德周)·김치운(金致雲)·김윤덕(金 潤德)·서상철(徐相喆) 등과 협의하여 3월 10일 동문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0 일 오후 4시 무렵 장꾼으로 가장한 시위대가 동문 시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하자 군중 2백여 명이 동참하였다. 일제 경찰은 3월 10일 만세시위 연루자로 65명을 체포하였다. 이처 럼 2차 만세시위는 학생과 시민이 연합해 전개한 특 징이 있었다. 그만큼 만세시위의 참가층이 넓어지 고 있었다. 1919년 3월 8일과 3월 10일 만세운동이 연이 어 일어나자 대구의 중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 와중에 대구고등보통학교는 학생들이 3월 24일 까지 동맹휴교 투쟁을 벌인 바람에 5월 20일에야 정 상수업을 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만세운동으로 인 해 무려 75명이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 법 위반죄로 징역 3년에서 6개월의 징역과 집행유예 를 선고받았다. 그 가운데 연령대는 최저 15세(이규 환, 학생)에서 최고 56세(이덕주, 농업)까지 넓었는 데, 10대에서 30대가 주축이었다. 직업의 경우 종교 계와 청년지식인이 주축을 이루면서도 노동자와 농 민 등 민중들이 만세시위의 주체로 등장하는 특징을 보였다.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의 덕산동 동문시장 만 세시위와 4월의 만세시위 대구 동화사(桐華寺) 지방학림의 만세운동은 달성 공산 출신으로 서울의 불교중앙학교에 다니던 윤학 조(尹學祚)가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만세시 위에 참여한 뒤 고향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결심  대구 3·1운동의 현장 서문시장의 1915년 경 모습(출처 『조선철도 여행 안내』, 조선총독부 철도국)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