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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의 생애와 독립운동 45 찾아 어디로 갔는가?” 이처럼 모두가 김구를 떠난 후에도 김학규는 끝 까지 김구 옆을 지켰다. 경교장을 지키면서 한국독 립당의 중앙 조직부장을 맡았고, 김구가 소장으로 있는 건국실천양성소의 부소장도 스스로 떠맡았 다. 당시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을 맡는다는 것은 보통의 인내와 배짱이 없으면 힘든 일이었다. 미군 정의 압력과 이승만 계열의 질시, 그리고 해방 후 에도 여전히 비호를 받고 있던 친일세력 등 도처 의 반대파로부터 압력이 거셀 때였다. 결국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육군 포병소위 안 두희(安斗熙)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 김구가 암살 당하면서 김학규가 관계했던 한국독립당과 건국실 천양성소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미 한국독립당은 1947년과 1948년, 두 번의 분당을 경험하면서 안재 홍·조소앙 등의 거두가 떠나고 세력이 약화된 상태 였다. 그런데 김구의 서거 이후 정부 당국은 한국독 립당 내부의 분열로 인해 김구가 죽었으며, 안두희 를 가입하게 했다는 이유로 조직부장 김학규를 구속 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독립당이 친공적인 입장을 견지했다고 호도하면서 탄압을 가했다. 김학규는 군사재판에 의해 국방경비법 제32조 이 른바 ‘이적행위’라는 제목으로 징역 15년의 판결을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그리고 누구보다 공산주의를 싫어했 던 김학규가 친공적인 이적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은 우리 현대사의 뼈아픈 비 극이었다. 그러나 김학규 개인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 았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이 서울 을 점령하면서 마포감옥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출옥 하게 되었다. 이후 수원의 한 농촌에서 은거 중이던 1956년 11월, 서울지방 검사처에 연행되어 40일 동 안 혹독한 심사를 받고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 나 그는 이미 몸과 마음의 병이 깊었고, 은거한 이후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병든 그의 옆을 지킨 이는 평생의 반려자요 독립운동 대열의 동지였던 부 인 오광심 뿐이었다. 1967년 9월 20일 사망 후 치러진 사회장 영결식 장면(국가보훈부 제공) 필자 김병기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임연 구원, 광복회 학술연구원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을 맡 고 있다. 상하이 『독립신문』 사장과 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 승학의 손자로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째 역사의 가학을 잇고 있다. 저서 『국외 3 · 1운동』(공저), 『김동삼』,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해방후 동향과 영향』 등과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