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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충청도 보은 출생으로 고종 4년 서기 1867년에 무과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찰방.감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융희 4년 경술국치의 변을 당하자 곧 자결순국하려하여 아편을 삼키고 거의 절명의 지경에 이르렀는데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생명을 구하게 되었으며 한해를 건너 서기 1912년에 일본천황 메이지(明治)의 상을 당하자 일제가 우리나라에서도 국상의 의식을 거행하며 국민들에게 상복을 입게 하려고 현지 일본 경찰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강요하자 승칠 공이 감연히 앞에 나서 우리 태황제 부자가 계신데 어찌 일본황제의 복을 입느냐 죽어도 입을 수 없으니 통감부에 고하여 빨리 나를 죽이게 하라고 대드니 일본경찰도 당황하여 다시 생각할 것을 권고하고 이튼날 다시 고문하였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수일간을 서로 힐난하였으며 가족들에게 청주에 용무가 있어 다녀온다고 하면서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 아래에 깊은 소가 있는 봉황대 위로 올라가서 북향 사배하고 절벽 아래에 깊은 소가 있는 곳으로 의롭게 몸을 던져 순절하였으며 기후 가족들이 공의 문서를 정리하다 다음과 같은 유서를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