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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진사 박공 재홍 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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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선생은 전북 남원(南原)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박재홍은 진사(進士) 출신의 호남 유림인사로서 인근의 우국지사들과 더불어 시국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이때 양한규(梁漢圭)가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영남·호남의 인사 일천여 명을 규합하여, 1906년 2월 12일(음 12월 30일) 일제히 남원읍에 진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은 남원 주둔 진위대(鎭衛隊)의 장병이 연말 연시를 기하여 휴가로 나가고 성내의 병력이 적은 틈을 타서 읍을 점령하고 무기를 전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박재홍은 이 작전을 위하여 참봉 유병두(柳秉斗)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과 함께 양한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받기를 청하였다. 13일(음력 1906년 1월 1일) 닭이 울 무렵 남원 의진은 양한규의 지휘하에 읍내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불의의 습격에 놀란 진위대 군사와 순검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그중 경부 1명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채 겨우 달아났다. 이로써 큰 희생 없이 남원 성중을 장악할 수 있었다. 4대문은 의병들에 의해서 파수되었으며, 진위대 소속 무기와 군수품은 모두 의병들에 의하여 접수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병 대장 양한규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가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장병들을 향하여 "나는 지금 죽겠소. 국사가 망극(罔極)하오. 제공들은 힘써 싸우기 바라오." 하고 전사하였다. 양한규는 남원 의진의 중심적 존재였다. 의병들은 전혀 훈련받은 바 없는 일반 백성들이었으므로 순간 당황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안 관군이 다시 대열을 정돈하여 반격태세를 취하니 당황하고 낙심한 의진 소속 장병들은 모두 흩어졌다. 모처럼 이루어진 의진의 남원성 함락이 백지로 돌아갔다. 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인근의 의진들도 남원 일대로 집결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하고 본래의 근거지로 돌아가 독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홍은 처음에 남원성을 탈출할 수 있었으나, 월여(月餘)간 은신생활을 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자진하여 경찰에 출두하였다. 그리고 남원 의진의 양문순과 박봉양(朴鳳陽)도 남원진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도 박재홍은 주먹을 부르쥐고 큰소리로 "반드시 왜를 멸망시키고 역적들을 토벌하고야 말겠다" 고 부르짖는 말과 기색이 준엄하여 적들이 감히 더 묻지 못하고 다만 장기간 가두어 두었다가 진도(珍島)로 유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