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page


448page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의 항일 투쟁사 이석용 의병장은 1878년 음력 11월 29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아버지 봉선과 어머니 조양임씨 사이에서 3대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제자백가서에도 능통했던 이석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내려지니 하늘이 동방예의지국을 버리는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이후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오다가 28세 되던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결심하였다. 이석용 선생은 1907년 9월 26일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후 9월 12일 그동안 의기투합하여 규합된 임실, 진안, 장수, 남원, 순창, 곡성, 함양 지역의 동지들을 진안 마이산으로 모이도록 하니 500여명이 구름처럼 모였다. 이때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구성하고 의병장이 되니 의병들을 통솔할 부서를 9개로 나누고 부서 당 3명씩 27명을 배치하였다. 의병들은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구성한 다음날인 9월 13일 진안읍을 습격하여 왜적을 가볍게 소탕시킴으로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어 2년여 동안 의병들이 많을 때는 500여명에서 10여명으로서 진안 용담과 임실, 장수, 남원, 운봉, 순창, 곡성, 함양 등지를 누비며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0월 일본군은 1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소위 '호남의병토벌대'를 결성하고 장기간 토벌에 나섬으로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이때 의병들의 생명만 희생될 뿐이라고 판단하고 1909년 3월 6일 의병조직을 해산시켰다. 그 후 이석용 의병장을 은거 중 1912년 다시 22명의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동포들과 손잡고 항일운동을 꾀하려 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10월 정동석의 배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임실경찰서를 거쳐 전주경찰서로 옮겨져 전주 법원에서 살인, 방화, 강도죄가 적용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1914년 4월 4일 정오 호남의병장 이석용은 광복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 채 37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