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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 적관서에 경고문을 발송하고 독립선언문과 관계신문 등을 전민가에 배포하시어 동3월 26일 구미에서 또 한차례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시었다. 그후 왜경에게 쫓기면서도 군자금을 모아서 만주로 망명하시어 고산좌에 활동기반을 세우시고 군관학교에 자금지원을 하시는 등 조국광복을 위해 전력을 경주하셨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투쟁목표를 세우시고 또 인재를 기루기 위해 다시 귀국하시어 고향 김천에서 사재를 넣어 양석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에 힘쓰시던중 왜경에세 피체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르시었다. 그 후에도 초지일관 자주독립을 쟁취할 결의가 더욱 굳어 졌으며 기독교우를 동지로 많이 규합하시고 삼남일대의 의병대장인 족친 김도현휘하의 많은 의사들과 함께 국민회를 조직하셨는데 경기 이인훈 논산 조종국 고창 문진창 익산 이기환 부여 오학수 장성 황희연 함평 윤상겸 김제 김동규 성주 여지연 김천 김동기 등과 함께 조달한 군자금을 모아서 선생은 극비리에 중국상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주석의 격려와 신임을 받고 돌아와 국내에서 투쟁활동을 전개하시다가 다시 피검되고 고문과 옥고를 거듭 당하면서 광복을 맞이하셨다. 선생은 건국의 초석이 될 청년교육에게 한국의 얼을 심어주기 위하여 김천에 대둔서림 선산에 죽림서림 상주에서 갑장서림 등을 세워서 청년교육에 정성을 다하시었다. 그리고 백범 선생이 시해당한 비보에 충격받아 두문불출하시고 선비의 곧은 정신 지키시며 1973년 3월 5일 11일 향년 80세로 별세하시니 동지들은 이곳 선열 묘지에 안장하고 1982년 광복절에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으로 추서하고 비를 세우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선생의 애국충정 하늘의 태양처럼 천추에 빛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