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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기(李成器)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의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방극용(房極鏞)·형갑수(邢甲洙)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전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체포된 덕과면(德果面) 면장이자, 그의 6촌형인 이석기(李奭器)가 남원읍으로 호송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군민의 분노가 더욱 컸다. 4월 4일 정오경, 그는 광한루(廣寒樓)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과 시장을 거쳐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있던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는 이후 일제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이용기(李龍器)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조동선(趙東先)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 행사는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적인 것이었다. 당시 덕과면 면장인 이석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갖고 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전례없이 많은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조동선·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만세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쩔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는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조동선의 자진 체포로 시위군중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였지만,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