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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6년 3월 Special Theme 광복 제81주년 기념 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 양상과 특징 ③ 宙一), 3월 8일 백남채가 예비 검속되었다. 이에 만세 운동을 추진하던 지도부는 일제 관헌의 엄중한 감시 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1919년 3월 6일 남성정교회 장로 김태련은 자신 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 인쇄하고, ‘대한 독립’ 이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계성학교 학 생들은 기숙사에서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 다. 또한 계성학교 학생 정원조는 대구고등보통학교 를 찾아 시위 일시와 장소가 3월 8일 오후 3시 큰 장 (서문밖 시장)임을 확인시켰다. 이러한 정보는 신명 여학교와 성경학교에도 전달되었다. 그리고 시위 준 비 참여자들은 만세운동에 앞서 ‘대한독립만세’ 또 는 태극기에 ‘독립만세’라고 쓴 삐라를 경북도청 정 문을 비롯해 대구 시내 곳곳에 붙였다. 1918년 3월 8일 오후 서문시장에는 만세운동 참 가자들이 속속 시장에 모여들었다. 만세시위는 군중 을 포함해 약 7, 8백여 명 정도 모인 서문시장의 중 심부에서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일부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이만집은 “지금은 조선독립의 시 기로서 각자가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자 연히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독립 만세를 고창 해야 한다”며 연설하였다. 연설이 끝나자 ‘대한독립 만세’ 삼창이 서문시장에 울려 퍼졌다. 이어 군중들 은 시위대를 형성해 서문시장을 나서 서문로를 통해 대구경찰서에 이르렀다. 대구경찰서 앞에는 일제 관헌이 진압 태세를 갖추 며 시위대를 막아섰다. 시위대는 경북도청으로 가지 못한 채 방향을 틀어 만경관을 거쳐 종로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강학봉의 인솔을 받은 제화노동자 30여 명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시위대가 약전골목 으로 나아갈 때 신명여학교 학생들도 다시 합류하였 다. 그 뒤 시위대는 달성군청이 있는 동성로로 행진 하였다. 달성군청 부근에 이르러 시위대는 5, 6대의 기관 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 군경과 맞닥뜨렸 다.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일 본 군경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던 김태 련을 집단 폭행했다. 그의 아들 김용해(金溶海)가 달 려들어 막아 보려 했으나, 그도 폭행당했다. 그 뒤 김 용해는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일본 관 대구 계성학교(출처 『사진으로 본 계성 100년』) 계성학교 교사 이만집 계성학교 교사 임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