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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5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을미사변(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을 다시 본다’ 청일전쟁과 영국의 방아용일책(防俄用日策) 제국주의 시대 국제관계사의 시각에서 볼 때, 청 일전쟁 발발 원인은 일본에게 대청(對淸) 개전의 물 꼬를 터준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이었다. 영국이 러 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동맹국으로서 일 본을 고려한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일본이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위한 거점으 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전략적 고려 때문이다. 둘째, 일본의 정치인, 육해군 장교들과 군사 시스템 이 중국보다 훨씬 영국의 그것과 부합한다는 군사 적 이해 때문이었다. 이에 영국은 이미 거문도 점령 (1885년)을 계기로 러시아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의 항구 장악을 저지한다는 정책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일본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국 력을 기르도록 영국의 지원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 다. 영국해군 교관의 일본 파견과 일본 군함의 영국 발주는 청일전쟁의 황해해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 다. 특히 정보통신 분야에서 영국의 대일협력은 일본 정부가 통신을 활용한 근대전쟁을 치르는데 결정적 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전신을 독점했던 영국이 한반도의 통신 주권을 훼손한 일본군의 불 법적 전신선 가설을 묵인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 다. 이를 통해 일본은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여 수 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을 후방에서 지휘하는 근 대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일본이 영국과 신영일 통상항해조약(新英日通商航海條約, 1894.7.16)을 체 결하여 조약개정에 성공하고 대등한 영일 관계를 수 립한 다음 날 청국과의 전쟁을 결정(7.17)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이는 영국이 청일전쟁 직후 (1895.4.5) 러시아가 대일 간섭을 제안하자 간섭할 근거가 없다는 명분으로 이를 거절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결과 대일 3국 간섭에 가담하지 않은 영국 은 향후 일본과 반러 영일동맹 성립의 초석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삼국간섭과 대청(對淸) 차관을 둘러싼 열강의 금융 전쟁 러시아 주도의 대일 3국간섭을 강력하게 추동했 던 인물은 재무장관 비테(С.Ю.Витте, 1849 ~1915) 였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에 시베리아철도 부설 의 주무장관인 비테가 깊숙이 관여한 배경에는 만주 독일 화가 헤르만 크낙푸스(Hermann Knackfuss, 1848~1915)가 그린 황화론 관 련 그림(1895,필자 제공)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풍자한 그림 요동반도를 반환한다는 청 · 일간의 조약문 (1895.11.8, 나무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