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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5년 9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중국 관내 항일무장조직 조선의용대의 재조명’ 련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들 중국인 청년들 중 일부 는 뒤에 조선의용대의 운영을 위해 만들어진 지도위 원회의 멤버로서 조선의용대를 지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씽즈훈련반은 한국 청년들을 대일항전에 동원하기 위한 모종의 계획이 군통에서 논의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세번째 단계는 1938년 10월, 난징 함락 이후 전시 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던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 漢)이 함락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 속에서 조선의용 대가 창설되는 단계이다. 제2차 국공합작의 가장 대 표적인 현장이던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지원 아래 만 들어진 조선의용대는 정치부 제2청장 캉쩌의 지휘 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조선의용대가 실제로 성립되는 과정에는 군사위원회 정치부 이외에 군사 위원회 휘하 일본 정보 전담기구였던 국제문제연구 소 소장 왕펑셩(王芃生) 과 국 제문제연구소 고문을 맡고 있던 일본인 반전주의자 아 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의 역할도 있었다. 이들은 김원 봉과의 협의를 통해 실제적 인 조직 계획을 만들어 장제 스의 승인을 받고 실제 활동 으로 이어지는 데에 창구로 서의 역할을 행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용대의 성립 은 장제스를 위원장으로 하 는 군사위원회와 산하 각종 정보기구들이 조직적으로 움 직인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용대의 활동과 국민정부의 통제 조선의용대는 성립 직후 화중(華中) 지역을 방어하 기 위한 전투인 우한보위전(武漢保衛戰)에 투입되었 다.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장이던 꾸오모루오(郭 沫若)의 회고에는, “조선의용대는 우한이 함락되는 위기 속에서 우한 시내 각처와 성벽에 페인트로 반 전, 반일 선전구호를 써붙이는 용감한 일을 감행하 여 일본군에게 커다란 심리적 타격을 줬다”고 썼다. 우한 함락 이후 광시(廣西)성 궤이린(桂林)으로 옮겨 간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은 조선의용대의 기관잡지 인 『조선의용대통신』과 중국인 지도위원이던 왕지 시엔(王繼賢)이 쓴 『중국 전장(戰場)에서의 조선의용 대』 라는 소책자 등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용대는 따로 독립적인 주둔지 중국측 지도위원 왕지시엔이 쓴 소책자 『中國 戰場上的朝鮮義勇隊(중국 전장에서의 조선 의용대)』 조선의용대의 연을 이용한 전단 살포 광경(출 처: 『중국 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