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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인민군이 임자도에 들어오면서 진리교회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이판일 장로는 인민군이 섬에 들어오자 목회자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의 집에서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마을 유지이면서 공산당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고 집에서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는 행동은 공산당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일 장로와 동생 이판성 집사는 체포되어 목포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 다행히 목포정치보위부장은 평소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이판일 장로를 알던 사람이어서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풀려나자마자 이판일 장로의 아들 이인재집사와 함께 목포 동명동교회로 찾아갔다. 교회 현판도 떼어지고 공산당이 사무실로 쓰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예배당에 들어가 한참동안 통성으로 기도했다. 이인재 집사 집에서 며칠 몸을 추스른 두 사람이 임자도로 돌아가려 하자 이인재 집사는 "유엔군이 곧 서울을 수복한다고 하고, 공산당이 최후 발악으로 사람들을 학살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조금 더 있다 가시라"고 간곡하게 말렸다. 그러나 이판일 장로는 "지금 내 심정은 교회와 성도들을 이리 앞에 두고 나만 무사한 곳에 있는 듯하여 심히 불편하고, 설사 내가 귀향함으로 화를 당한다 할 지라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영광이 있을 것이니 뭘 주저하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순교를 소원했었고,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어쨌든 교회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심했으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면서 1950년 9월 28일 임자도로 향했다. 그러자 임자도에 돌아 온 며칠 뒤인 10월 5일 새벽 2시 공산당원과 그들에게 동조하던 주민들은 이판일 장로 형제와 노모 등 일가족 13명을 끌고 나갔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바닷가로 끌려간 그들은 곤봉과 죽창, 농기구에 맞고 찔리면서도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모래 구덩이에 파묻혀 생매장으로 순교를 당했다. 교회의 중심인 이판선 장로 일가를 살해한 공산당과 동조자들은 계속하여 진리교회 성도 35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예수를 믿는 것과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은 섬 임자도에서 진리교회 교인 48명이 순교를 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