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page


430page

리에 돌아와 효친태선의 치성을 다하는 한편 고장발전의 지름길은 지역민의 복지향상과 풍속순화에 있음을 통감하고 옥보천에 다리가 없어 주민의 내왕과 학생들의 통학이 불편하매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당시 청와대 박지만 군에게 이 사정을 전하게 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니 오늘의 지만교라는 명칭은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공의 끝없는 향토애는 부실한 제방으로 이곳 농토가 소량의 비와 한밭에도 피해가 극심한 상황을 지나칠 수 없었다. 이에 관련 정치가와의 끈질긴 협상 끝에 튼튼한 제방과 양수장을 설치 오늘의 문전옥답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 고장의 불편한 교통을 해소하고자 수차 요로에 진정하여 그 뜻을 이루는 한편 면민의 숙원인 복지회관 건립에 자비 2백만원을 쾌척하면서 솔선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랑스런 종합복지회관을 이룩하였다. 공은 이 나라의 장래는 오직 청소년에 좌우된다는 신념으로 일생동안 졸업식때마다 선행 학생을 발굴 포상하며 명심보감을 부상으로 주어 수신에 진력하기를 당부하였다. 생전에 4백여 쌍의 주례를 집례하면서 둥근 거울을 주고 항시 원만한 생활과 자기 반성의 징표로 삼도록 하였다. 공의 그 큰 뜻은 육영과 인술로까지 승화했으니 중학교가 없는 이 고장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신을 보내 온틀의 현도중학교가 설립되게 하므로써 주민의 시간적 경제적 부담을 덜었고 선고에게서 배운 한방지식에다 화란인 내과의사에게 배운 양방지식까지 겸비한 공은 이곳 무의촌을 지키며 무수한 인명을 구제하였다. 공은 슬하에 3남 4녀를 두고 198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니 공의 불행한 서거를 애통해 하는 주민들의 호곡이 하늘에 당핬다. 이제 가신지 4년 우리면민 일동은 공의 생전에 끼치신 숭고한 자취를 오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