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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구 3 · 1운동의 전개 양상과 특징 43 1919년 3월 8일 큰 장(서문시장)에 서 시작된 대구의 3·1운동은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빠른 편이었다. 이를 계기로 3·1운동은 경북으로 파급되 어 5월 7일 청도의 만세시위로까지 이어졌다. 대구 3·1운동은 1919년 3 월 8일부터 4월 26일까지 두 달간에 걸쳐 기독교·불교·천도교 등 종교계, 농민·노동자·교사·학생·청년·여성·상 인·일반 시민 등 다양한 계층과 직업 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진 전민족 적 항쟁의 담대한 여정이었다. 대구 3·1운동은 다양한 역사적 의의를 남 겼다. 먼저,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 개 념을 확고히 인식하게 하였다. 둘째, 공화주의 이념에 기초한 대한민국임 시정부 수립에 이바지하였다. 셋째, 1920년대 이후 국내외 민족운동의 노선과 이념 분화를 통한 민족운동에 이바지하였다. 넷째, 민주주의와 인 권이라는 근대 담론을 담고 있었다. 3·1운동의 들불이 대구의 서문시장에서 타오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현재 탑골공원)에서 전민족적 항 일운동으로서 만세독립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그것은 한국인의 의식에 농축된 자주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민족자결이 고조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폭발한 것이었다. 1910년대 대구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배에 맞선 달성친목회의 재건, 광복회, ‘대구권총사건’ 등의 항일운동 이 펼쳐지고 있었다. 1919년 3월 8일 큰 장(서문시장)에서 시작된 대구의 3·1운동은 한반 도 남부에서 가장 빠른 편이었다. 이를 계기로 3·1운동은 경북으로 파 급되어 5월 7일 청도의 만세시위로까지 이어졌다. 대구에서는 1919년 2월부터 만세시위 운동의 움직임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꿈틀거렸다. 1919년 2월 16일에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질녀 김마 리아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본을 거쳐 대구에서 계성학교(啓聖學 校) 교사 백남채(白南採)를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그 뒤 백남채 는 남성정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과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金永瑞)·김 태식(金台植) 등을 만났다. 그즈음 2월 24일 이만집 목사는 자신을 찾아 온 민족대표 33인으로 경상도의 연락을 책임진 이갑성(李甲成)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이만집은 다시 교회 관련 인사와 계성학교 교 사를 만났다. 이어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에 함께 할 것을 권유 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5일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은 자신이 하숙하던 대 남여관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는 여관집 아들 허범(許範)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허범은 다시 친구 신현욱(申鉉旭)을 비롯한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 약속을 받 아 냈다. 이어 허범은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을 찾아가 만세운 동 동참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평양의 숭실학교 학생 김무생(金武生)은 1910년 3월 7일에 경북 김천의 예수교 전도원 박제원과 함께 대구의 신명여학교 교사 임봉선(林鳳仙)을 만나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 하였다. 그 과정에서 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에게도 만세운동 계획 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1919년 3월 3일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