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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을미사변의 국제관계사 43 아시아의 해양 국가인 일본의 대륙 진출이 1895년 러시아 · 독일 · 프랑스 유럽 대륙의 3대 열강에 의해 저지되 는 과정에서 조선의 왕후가 희생되었 다(을미사변). 간섭 3국의 결속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대일(對日) 삼국간 섭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를 틈타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이 루고자 했던 조선 보호국화를 재차 추진하게 되었다. 요컨대 을미사변은 삼국간섭이 화장 처리만을 남겨 놓 은 작동불능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일본이 감행한 만행이었던 것이다. 130년 전의 을미사변을 근대 국제관 계사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관계 가 투영된 근대 한반도 지정학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는 아시아의 해 양 국가인 일본의 대륙 진출이 유럽 대륙의 3대 열강에 의해 저지되 는 과정에서 조선의 왕후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승전국 인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선과 청국의 독립을 유린하는 과도한 전후처리를 도모하자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 초로 외교동맹을 결성하여 일본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에 3대 유럽 연합국이 일본에 대항하여 공동보조를 취한 사건을 ‘삼국간섭(triple Intervention, 1895.4.13)’이라 부른다. 유럽의 간섭 3국을 결속시킨 이데올로기는 인종론적 황화론(黃 禍論)이다. 이는 청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이 청국과 조선군을 조직 하여 과거 몽골의 유럽침략을 재현할 수 있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 (propaganda, 정치적 선전)였다. 더욱이 황화론의 이면에는 일본이 요 동반도(遼東半島)를 장악할 경우, 중국에서 간섭 3국의 경제적 입지가 대폭 축소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청국 (淸國) 시장에서 축출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황화론이라는 인종론적 이데올로기로 엮여있었다. 따라서 간섭 3국의 결속력이 장기 지속될 수 있을지 여부는 의문이었다. 이들의 관심사가 인종론적 프로파간다 보다는 간섭의 대가에 따른 구체적 이권 획득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독일은 황제정(皇帝政)이라는 공통의 정치체제를 유지했지 만, 프랑스의 공화정은 이질적이었다. 러 · 독은 청나라 연안에서 해군 기지를 획득하고자 했던 반면, 프랑스는 유럽 안보체제 유지에 더 관심 이 많았다. 이는 프랑스 안보의 핵심이 러시아와 1894년에 체결한 군 사동맹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동맹국 러시아에게 충실하고자 했을 뿐, 보불전쟁(1870 ~1871) 이후 독일과는 화해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 서 간섭 3국의 결속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대일 삼국간섭의 종료를 의 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틈타 일본이 청일전쟁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한 국 보호국화를 재차 추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을미사변 은 삼국간섭이 화장 처리만을 남겨 놓은 작동불능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일본이 감행한 만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