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page

Special Theme • 중국 국민정부와 조선의용대 43 만 아니라 이후 한인 군관 훈련 과정이나 항일전 참 여 과정에 모두 역행사와 역행사의 후신인 군사조 사통계국(軍事調査統計局, 흔히 軍統으로 약칭)이 관 여했던 것으로 본다면 조 선의용대의 성립과정 자 체가 국민정부 군사 정보 기구의 통제와 관할 아래 들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다. 그런 만큼 의열단 측에 대한 지원은, 군통의 주요 임무인 군사정보 수집, 방 첩, 대적선전(對敵宣傳)을 비롯한 군사 특공 활동을 목표로 해서 논의, 추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은 조선의용대의 성립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의용대의 성립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 단계는 1932년 10월 난징 교외의 탕산(湯 山)에 만들어진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흔히 줄 여서 혁명간부학교)를 통한 한인 군관 양성이었다. 혁명간부학교는 원래 역행사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 한 훈련반의 하나로 만들어졌는데, 그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은 역행사의 주요 멤버이면서 뒷날 군통 의 핵심 지도자가 된 캉쩌(康澤)였다. 1935년 10월 에 문을 닫을 때까지 혁명간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한인 청년들은 모두 140여 명이었다. 두번째 단계는 1937년 7월 루꼬우차오(蘆溝橋)사변으로 중일 전면 전쟁이 발발한 이후 단계인 1937년 12월 김원봉 휘 하 통합 좌익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중심으로 난징에 모인 80여 명의 한인청년들을 장시 성(江西省) 씽즈현(星子縣, 현재의 廬山市)에 있 던 중 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흔히 씽즈훈련반으로 약칭) 에서 약 6개월간 훈련한 것이었다. 씽즈훈련반 또한 캉쩌의 책임 아래 운영되었다. 특히 눈에 띠는 대목은 씽즈훈련반의 한인반(韓人區 隊)에 20여 명의 중국인 청년들이 함께 배속되어 훈 조선의용대에서 발간한 기관지 『朝鮮義勇隊 通訊(조선의용대통신)』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구호를 통한 대적 선전활동 모습(출처: 『중국  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 탕산 훈련반, 씽즈특훈반, 조선의용대를  관할했던 군사조사통계국의  주요 간부 캉쩌(康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