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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경북지역 후기 의병의 봉기와 일본군의 탄압 43 용기를 비롯한 다수의 장령이 전사한 뒤, 9월 3일 정 환직이 대장으로 취임해 진용을 재편성했다. 정환직 은 청송의 보현산과 영일의 북동대산을 거점으로 청 송 · 영천 · 영일 · 흥해 · 청하 · 기계 일원에서 투쟁했다. 한편으로 13도창의대진소가 추진하던 서울진공작 전에 참여하기 위해 관동지역으로 북상을 추진했다. 그는 관동 진출을 위한 최후의 방책으로 진용을 분 산하여 북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정환직은 1907년 음 11월 6일(양력 12월 11일) 청 하군 죽장면 고천의 각전에서 영천수배대에 의해 체 포되었다. 정환직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귀순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였다. 대구로 이송되던 중 음 11월 12일(양 12. 17) 영천의 남쪽 교외에서 총 살 · 순국하였다. 후기 의병의 해산과 일본군의 탄압 ➊ 소규모 의병부대, 불굴의 항전 을 벌이다 190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강 년·신돌석·정환직 의병장이 잇달아 순국하였다. 이처럼 대규모 의병부대 를 이끌던 대장들이 차례로 순국한 뒤, 그 예하 부대장들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대일항전을 이어갔다.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던 중군 장 김상태는 독자적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영주 · 순 흥 · 풍기를 중심으로 소백산과 일월산 일원에서 유격 전을 전개했다. 1911년 6월 14일 순흥면 연화동에 서 일본군 토벌대의 야습을 받고 체포될 때까지 최 성천 · 정경태 · 윤국범 등과 함께 싸웠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출신의 최성천은 1910 년 경부터 순흥 · 영주지방에서 김상태와 연결하여 영 주 · 예천 · 용궁 · 안동 일대를 전전하며 유격전으로 일 본군을 위협하였다. 1910년 3월 일본인 상인 1명을 처단했고, 1910년 7월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의 협동 영천문화원 앞에 세워진 산남의진 기념비   정환직 · 정용기 의병장의 고택, 충효재(영천시 자양면, 영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