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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고개의 유래
조선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양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세웠으나 아직 자신이 죽은 뒤 묻힐 명당을 찾지 못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지관을 파견하여 명당을 찾게 한 결과 드디어 명당을 찾게 되었는데, 그곳이 곧 동구릉안에 있는 건원릉 자리이다. 태조는 중신들과 지관을 거느리고 양주로 가서 검암산 밑에 있는 능터를 직접 보고 과련 그 자리가 명당임을 확인하였다. 태조는 흡족한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망우산 고개 위에서 잠시 쉬면서 멀리 건원릉 터를 바라보면서 신하들에게 "아아! 이제야 오랫동안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 라 하였다.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고개(근심을 잊는 고개)라 하고 이 일대를 망우리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망우리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 현재의 망우리 고개는 옛 고개 보다 남쪽에 새로 낸 고갯길이며, 옛 고개의 위치는 종전의 중앙선의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터널 윗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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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문. 예로부터 서울의 도심은 4대문을 기점으로 안쪽에 위치하여 왔다. 도심은 광역화되고 서울로 접근방법은 다양화 된 오늘날 4대문은 더 이상 서울의 관문이라 할 수 없다. 이제 서울의 근교와 인접한 많은 지역들이 서울의 관문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 중랑구는 서울과 구리시를 연결하는 동북쪽의 관문이다. '소통의 문'은 대문자인 문(門) 자(字)를 형상화하여 이런 중랑구의 상징성을 표헌하였다.
화합의 삼위일체. 중랑구를 품고 있는 3개이 봉우리들인 망우산, 용마산, 봉하산의 기를 모아, 구민의 화합과 행복을 염원하는 구민의 마음을 3개의 기둥으로 표현하였다.4
도약을 위한 탈피. 오랜 역사를 간직한 중랑구의 전통을 기반으로 나비가 허물을 벗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아오르듯, 서울 동북부의 중심도시 힘차게 도약하는 중랑구늬 밝은 미래를 기둥 하단의 은백색과 상단의 검은색으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