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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신없이 강의실과 방송국을 오가며 겨울 방학이 끝날 즈음, 가정 사정으 로 2학년 등록이 어려워 67년7월 공군단기사병으로 입대했다. 48개월 복무 중, 전역 5 개월을남기고군복을입은채71년3월에복학을했다. 그리고 7월 전역 후 정식으로 VOU에서 다시 ENG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때VOU 내의분위기는요원들간에불협화음으로혼란스러운분위기였다. 방송부장이었던 S군과 여러 가지 간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누군가 한 사람 두 사람특정인에대한불만을토하듯쓰여지고있던낙서노트가여기저기굴러다녔다. 72년내가방송부장을맡으면서, 하고싶은말을글로쓰자는의미로‘언중(言中)의 서(書)=언중지서(言中之書)’라는 제목을 붙여 사무실과 PD실에 비치했다. 그 후 방송 국 운영 방안의 개선과 서로의 부만이 소통으로 이루어지면서, 화합된 분위기로 바뀌 어 갔던 것 같다. 그해10월유신으로무기한방학이되고, 교문도폐쇄되었다. 아무것도할수없었 다. 우리는 몇몇 형, 언니들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복학생 아저씨라서 내 뜻과 무관하게언니들의보호자로부탁을받고, 일주일간의여행일정에동참하기로했다. 이세운, 원종배, 최효남과이은숙, 이애련언니가참가했다. 대전동학사-계룡산-갑 사-공주 낙화암-만리포-칠갑산 등을 돌았다. 여행 중 만리포에서의 원종배의 탁월한 기타 솜씨와 바닷가 석양에 매료되어, 일주일에서 10일을 넘기며 경비도 바닥이 났고, 나의 군대 후배의 부친이 군수로 계시던 예산 군수 사택에서 하루 신세도 지고, 서로 의 비상금을 톡톡 털어, 겨우 차비를 마련하여 집까지 올 수 있었지만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을남겼다. 72년, 학원제 행사에도 원종배의 지휘로 우리 방송국팀이‘올망졸망’이라는 이름 의 합창단으로 출전하여‘이른아침’이란 번안곡으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매년 정기 행사였던‘퐁퐁(옥수수뻥튀기)파티’를 열심으로 준비해 주던 언니들의 수고로 요원들 간의 우정과 각 파트간의 협력도 아주 원활하게 다져졌던 것도 같다. 밥 먹듯이 방송 국에서 이승일 형님과 쪽잠을 자며‘국군의 방송’녹음과 예하부대 배부용 테이프 수 기별 Essay | 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