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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6월 14일 상하이 공제병원에서 피체된 김창숙은 국내로 압송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김창숙은 일제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고, 자신을 포로라 표현하며 변호사의 변론을 거절하는 등 일제의 모든 통치 체계를 부정하였다. 1927년 12월 14년형을 선고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29년 5월 병이 악화되자 형 집행정지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고향으로 옮겨졌으나 곧 재수감되었다. 수감생활 중 김창숙은 간수에게 절을 하지 않고, 친일파의 일선융화론을 읽고 감상문을 쓰라는 명령에 불응하며 3·1운동을 상기하는 시를 적어 내어주며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지를 않자, 일제는 '야단스러운 고문'을 가하였다. 1934년 9월 지병이 악화되어 형 집행정지로 출옥한 김창숙은 1940년 망명과 수감생활로 못한 모친의 시묘살이를 하여 유학자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차남 찬기를 충칭에 보내는 등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