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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항쟁하였으니 이것이 정미의병이며 후일 조국을 광복케 한 독립군의 초가 된 것이다. 1907년 7월 20일 공께서는 우리 동포가 일본인으로부터 받는 압박을 아푸게 여기고 안연히 보고 참을 수 없어 친일매국하는 적신들을 향하여 우리들이 충의의 지사를 일으키고 충의의 칼이 너희들의 머리를 베고 조시에서 너희들의 배를 갈라 우리 황상의 분을 씻고 우리 국민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감연히 선언하고 또한 그들의 죄상을 밝히되 을사오조약으로 우리 이천만 동포가 노예의 지경으로 몰려 들어가게 한 죄, 다시 7조약을 맺어 일본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죄, 황상을 위협하여 강제로 선위토록한 죄, 일체의 권리를 원수의 나라 일본에게 양도치 않음이 없는 죄, 국무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고 통감부 만찬회와 일본인과의 교섭으로만 능사를 삼는 죄, 통감만 알고 군부를 모르는 체하며 일본만 알고 자기 나라를 모르는 체하는 죄, 일본에 아부하여 조국의 이해를 묻지 않고 다만 자기 일신의 부귀만 도모하는 죄 등 무려 25개 항목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 성토하고서 향리인 이천으로 내려와 이근풍 주하용 임옥녀 신규희 조상현 원효상 윤평순 등과 몽의한 후 공은 진찰장의 임을 맡고서 모집된 포군 70을 이끌고 우선 이천읍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기병대를 습격하였다. 다시 광주로 이동하여더니 총대장 이근풍이 도주하였음에 의병의 추앙을 받아 공이 그 중임을 맡게 되였다. 군세가 점점 늘어 음죽 죽선 안성 양지 광주 양주 양근 등지로 불몰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지대한 타격을 주었으면서도 공의 부대는 별로 피해를 본 것이 없다 하였으니 공의 신묘한 전법을 알 만할 일이다. 그러나 군자가 없어 매양 지나가는 마을에서 식사의 제공을 받게 되었으니 작전상 지장이 막대하였다. 1907년 9월 2일 공의 부대가 양주 가곡에 이르렀을 때 홍병수라는 친구를 맞나 그 꾀임에 속아 한성에 부호 홍세영 집으로 군자를 얻고자 잠입하였던 바 군자는 고사하고 경서로 밀고되어 포박되기에 이르렀다. 석재로다 투옥되어 6개월간이나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의연한 자세로 일본과 일본에 아부하는 친일적신들의 죄행을 힐책하였다. 1908년 3월 13일 평리원법정에서 대장이 되어 중인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킨 죄를 물어 교수형이 선고되었으니 슲으다. 크게 충절을 지키던 공은 평생 영사를 못다 이루고 한 많은 망국의 고혼이 되신 것이다. 춘풍추우 83개 성상 이제 우리는 공께서 청사에 남기신 빛나는 충절의 공훈을 이 빗돌에 새겨 세인으로 하여금 다시 옷깃을 가다듬고 슲은 고혼을 추모하고자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