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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당은 두 아들인데 영은 효행으로써 참봉에 제수되고 형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성효재이다. 다음 이는 장사랑이다. 성와는 외아들 옹이 참봉이었고 병재도 외아들 적이 효행으로서 참봉에 제수되었다. 형조참판은 아들이 셋인데 경연은 참의로 증직되었고 경신은 선무 일등공신으로서 밀양부사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삼우제이다. 경인은 임진왜란에 창의했다가 순절하여 지평으로 증직되었고 호는 용연이다. 장사랑은 네 아들이 경전은 임란에 제일 먼저 창의해서 선무공으로 창녕현감에 제수되고 병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제우당이다. 경윤은 첨정으로서 창의하여 선무공이 있었으며 병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호는 국헌이다. 경선은 만호였는데 창의했다가 순절하여 승지로 증직되었고 다음은 경준이다. 옹도 4형제를 두어서 경승은 장사랑이고 경생은 참봉이였으며 경서도 장사랑이고 경찬은 효행으로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한강 선생의 문인이었다. 참의도 네아들인데 환은 참봉이고 찬은 우후이며 창의해서 선무공신으로 되었고 호는 운곡이다. 우도 임란에 창의했고 이괄의 역란에는 진무 일등공신으로서 남포현감에 제수되었으며 병자호란때에 쌍령에서 순절하여 호조참의로 증직되었는데 호는 기포이다. 숙은 봉사이고 선무공신이며 호는 용암이다. 규는 호조좌랑으로 증직되었다. 병조참판은 아들 지남이 무과에 올라 부정이었고 창의하여 선무공신이었다. 또 아들 철남은 부장이었고 선무공신이었다. 지평도 외아들 선이 우윤이었고 창의하여 선무공신이며 호는 괴정이다. 제우당도 외아들 정이 봉사였고 정랑으로 증직되었다. 국헌은 두아들 인이 주부이고 창의공신이며 호는 행와이다. 또 구가 판관이었고 선무공신이었다. 참봉은 외아들 근이 진사·참봉이고 선무공신이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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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후손이 거의 천년을 이어 내려서 한뜰에 넷 봉새와 한 당에 열넷 의사가 성하고 빛났다. 그러나 세대가 더욱 멀어지니 문헌이 점점 없어졌고 다만 을미년에 중건한 비문을 후손이 였든 진사 경림씨가 지은 것이 있어 관함과 자손록만 전해 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비로소 밀주지구본과 자인 박씨 집 옛 편지 종이를 상고하고 북지 후손 집에 갈무리된 영정 시·찬·시첨이 나와서는 선생의 유적을 환하게 기술할만 하였다. 한 고을 인사들이 의논해서 덕남사에 향사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또 한벌을 모사하여 열네 의사를 제사하는 용강사에 다 봉안했으니 사문이 높이 보답하는 의전은 진실로 다음 시기를 기다림이 있었거니와 무릇 덕을 좋아하는 우리 무리도 또한 소문을 듣고 권장되는 바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선생의 후손 원경이 나와 함께 사귀어 온지 오래여서 그 숨겨졌던 사적을 밝혀내는 글을 나에게 부탁한다. 이미 여러번 사양했으나 되지 않으므로 감히 옛 기록을 안본으로 해서 위와 같이 서술했으나 망녕된 죄는 피할 데가 없다. 명하기를 「도리로 되기 어려우니 자릉의 솔이던가. 우뚝하게 빼어난 강후의 솔이던가. 곡령 5백년 강상을 심어서 아름답게도 홀로 청청할 송계 솔이던가.
숭정 기원후 2백 11년 무술(헌종 4년) 5월 일
통훈대부 청주목사 청주진 병마첨절제사 상당수성장 진성 이휘령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