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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의사는, 전통적 유가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손일민·김대락·이상용·김동삼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가 설립한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이나 장춘의 상원양행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을 맡았다. 채기중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피체되어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강순필·임봉주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의 부호 장승원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장두환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 도고면 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피체되었고, 사형을 언도받아 4년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