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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초명은 유천 본명은 정옥 자은 봉완 불명은 용운 호는 만해(卍海) 혹은 만해(萬海)라 한다. 단기 4212년 을유 8월 29일 음7월12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곡에서 청주한씨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사족가문에서 부 도사 응준과 모 온양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6세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9세에 문리를 통해하니 신재라 칭송하였다. 26세에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여 결학의 대가로 명승강사가 되었다. 단기 4243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 철폐하고 33세에 만주에 망명하여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등의 지사들을 만나서 독립운도을 협의 하였다. 단기 4250년에 설악산 오세암에서 선리를 오도하였고 단기 4252년 기미 1월에 지우 최린과 상의하여 독립운동을 적극추진할 것을 결의하니 이것이 3.1만세운동의 발단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게 청촉 작성하고 이에 공약삼장을 추가보완하여 3월1일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후 옥중에서 독립의 자신과 이유를 별도의 장문으로 발표하였는데 그 문장의 논봉이 3.1운동사중 최상이라고 사가들의 정평이 있다. 단기4257년에 불교청년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하였고 49세에 민족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및 경성지회장에 피선도었으며 단기4262년에 광주학생의거의 진상규명을 위한 민중대회를 동지들과 주도하여 옥고를 겼었다. 3.1운동 전후에 걸쳐 만년기까지는 불교대전 불교유신론 채근담강의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저작하고 유심지 불교지를 발간하였다. 선생은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위무불굴한 ?의행적을 남기기고 단기4277년 66세 6월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