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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선생 다전기적비
여기는 근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유학을 새롭게 결집하고 일제하에서 선비가 처신할 민족정도의 길을 연 유서깊은 다전마을이다. 원래 다지라고 불러왔는데 1896년 이곳에 은거한 면우선생이 다전이라 명명한후 그 명성이 선생의 행적과 음신따라 나라 안팎으로 알려져 다전은 역사의 고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생은 1846년 산청군 초포에서 태어나 약관에 이미 유학의 자기경지를 개척하면서 그 명망이 경향에 떨치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은거하자 전국의 홍유명사들이 운집하여 한적했던 산촌은 학문의 도회로 변모하게되었다. 그 때 다전에 이르는 덕유 가야의 고갯길은 구한말 구국의 지혜를 찾는 경세가와 어사 그리고 도긻운동가와 시인 묵객등 선생이 타계한 1919년까지 당대지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 속에서 선생은 퇴계학통에 남명학을 종합하고 그 위에 우리의 천년 유학을 근대적으로 정리한 수철한 다전학풍을 일으켰다. 때문에 이산 골마을이 1919년 3.1운동때 전국 유림을 대표한 파리장서의 산실이 될수 있었다. 곽다전으로도 애칭되던 면우선생은 파리장서에서 전통유학의 척사론을 지양한 민족의 독립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우리 지성사의 격을 한층 더 높였다. 이것은 망국죄인을 자처하며 이곳 협지를 지키면서 선생이 이룬 또하나의 결정으로서 그 유방은 만고에 기리게 될것이다. 그러한 다전이었으므로 선생을 흠앙하여 솔춘정착한이도 적지않아 김해김씨 고연공 3형제는 다전에서 취호하여 다봉 다원 다태라 하고 세거지로 삼았으니 후손이 지금도 이곳에 살고있다. 다전마을은 개창한지 400년에 세족은 은진임씨 밀양박씨 전주이씨였는데 지금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덕우공후손이 김해김씨와 더불어 다전고사의 영예를 지키며 살고있다. 이제 면우문하 25년의 영광은 그 자취만 남고 다전은 다시 한적한 산촌으로 돌아갔지만 이끼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