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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독립만세운동 전개 실상으로 본 함경남도의 3·1독립운동 41 충북 추풍령 출생으로 충남대학교 사학과·같은 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교직과 대학 강사를 거쳐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을 역 임했다. 주요 저서(공저)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20(국내 3·1운동Ⅱ-남부), 『경북독립운동사』Ⅲ(3·1운동), 『충남독립운동사』2(3·1운동), 『공주독립운동사』, 『청양 의 독립운동사』, 『예산의 독립운동사』, 『홍성의 독립운동사』, 『성주 3·1운동과 파리장서』, 『영덕의 독립운동사』, 『의성의 독립운동사』, 『서산독립운동사』 등이 있다. 필자 김진호 넷째 천도교와 기독교 및 학생들이 초기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즉 집단의 결속력이 어느 기관보다 강했던 천도교, 기독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이 60회로 전체 116회의 51.72%이었다. 이들의 활동으 로 3월 10일 전후로 도내 각처에서 독립만세를 외치 게 되고 3월 14일 기점으로 전후 3~4일에 최저 4회, 최고 13회에 걸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다섯째 각처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실행됐다. 마을 34회, 읍내 15회, 면내 7회로 주거지나 생활 지역에 서 46회의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 시장에서도 34 회나 만세를 고창하며 시장 일대를 활보했다. 집합 장소가 학교 교정이고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14회나 되는데, 타 지방보다는 월등히 많은 사 례이다. 또한 일제 행정기관 14개소, 치안기관 33개 소에서 독립만세는 3·1독립운동의 공격성과 독립만 세운동의 역동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섯째 독립운동 주도 세력의 활동 분포가 지역적 양상을 보인다. 천도교측은 갑산·단천·북청·이원·홍 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기독교 측은 원산·함흥·신흥에서 활동했다. 교사와 학생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은 신흥·북청·이원·함흥이었다. 일곱째 활발한 독립운동에 그 탄압도 잔혹했다. 참가자로 일제측이 약 25,000명, 박은식의 『한국 독 립운동지혈사』에 59,850명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최소 56,000명, 최대 59,000명으로 추산하면, 참가 율은 도민 121만명에 4.63% ~ 4.88%로 도민 전체 의 약 5%가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했다. 이에 사 상자 142명으로 사상률은 전체 참가자의 0.24% ~ 0.25%, 체포자 1,508명으로 체포율은 전체 참가자 의 2.56% ~ 2.69%이다. 경성복심법원에 재심을 청구한 인사가 455명으 로 2심 공소율은 전체 체포자 1,507명의 30.19%이 다. 즉 일제 군경에 체포된 인사들의 1/3이 최소한 복심법원까지 재판이 진행되는 사법적 탄압을 받았 다. 3월 28일 보도에 의하면 홍원에서 경찰에 체포 된 58명에 대해 방환(放還) 2명, 태(笞) 60(도) 42명, 태 30(도) 2명, 검사국 송치 12명으로 처치(處置)하였 다. 탄압기관인 경찰서와 헌병대에서 즉결처분으로 태형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4월 초 함흥지 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약 500명 가운데 100여 명 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는 경찰이나 헌병들의 마구잡이식 수사와 신문이 자행되었음을 반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