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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중국 국민정부와 조선의용대 41 1932년 4월 말 윤봉길의거 직후부 터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대 한 지원이 본격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상하이사변으로 수도인 난징 (南京)까지 함락될 수 있다는 위기의 식 속에서 ‘전국적 규모의 장기적인 대일항전’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서 둘러 마련한 이른바 ‘장기항전’ 전략 때문이었다. 국민정부 측에서 마련 한 ‘장기항전’ 계획에 따르면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지 배 아래 들어간 중국 동북지역(만주) 에서의 민중적 지원군에 의한 대일 항전이 중요해졌고, 그 중요 구성분 자였던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대일항 전에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 던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항일전쟁 시기의 한중연대나 ‘한중공동항전’을 중국 측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결과 로만 보기는 어렵다. 중국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장기항전’ 전략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중국정부의 지원은 윤봉길의거 가 일어난 직후인 1932년 5월 이후 본격화되었다. 이런 까닭에 그간 한 중 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윤봉길의거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은 장제 스(蔣介石)를 비롯한 국민정부 측에서 한국독립운동을 본격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장제스일기나 국민 정부의 공문서(檔 案)를 비롯한 중국 측 자료 가운데 윤봉길의거 자체에 대한 감동이나 긍정적 평가를 찾아볼 수는 없다. 오히려 윤봉길의거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던 제1차 상하이사변(上海事變)이 정전 협상을 통하 여 해결되기 일보 직전에 있던 국민정부 측에서는 윤봉길의거가 정전 협상의 걸림돌이 될까 노심초사했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봉길의거 직후부터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 세 력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상하이사변으로 수 도인 난징(南京)까지 함락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전국적인 규 모의 장기적인 대일항전”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서둘러 마련한 이른 바 ‘장기항전’ 전략 때문이었다. 국민정부 측에서 마련한 ‘장기항전’ 계 획에 따르면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민중적 지원군에 의한 대일항전이 중요해졌고, 그 중요 구성분자였던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대일항전에 ‘동원’할 필요 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점은 중국 측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33년 봄 장제스를 면담했던 김구가 (윤봉길의거와 같은 종류의) 무장 폭동을 위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하자 장제스가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몇 차례의 무 장폭동으로 몇 사람의 일본 장군이나 정치지도자를 없앤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 없다. 따라서 ‘장기적인 항전’을 위한 군관의 양성이 더 필요하다”고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렇게 하여 마련된 중국 측의 지원은 두 가지 방 향에서 추진되었다. 하나는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열단 내지 민족혁명당(민혁당) 등 좌익계열에 대한 국민정부 군부의 지원이고, 다 른 하나는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당(한독당) 계열에 대한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