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page

Special Theme • 경북지역 후기 의병의 봉기와 일본군의 탄압 41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한 왕산 허위는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을 주 도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계획하고 있던 서울진공을 실현한 것이었다. 후기 의병의 확산과 투쟁 1) 후기 의병의 확산 ➊ 해산군인이 합류하다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 서 의병항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서울 에서는 시위대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시 가전으로 맞서다가 의병으로 전환하였고, 지방에서 는 각처의 진위대가 군대해산에 즈음하여 의병에 합 류하였다. 이리하여 의병부대는 군사적 기반이 강화 되었고, 일제의 통감정치가 심화되면서 의병의 투쟁 의지도 강화되었다. 경북지역에서도 기존 의병부대에 해산군인들이 편입됨으로써 그 전술과 무기가 향상되고 강화되었 다. 경북 선산 출신의 왕산 허위는 1907년 9월 경기 도 연천에서 창의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했는데, 해산군인이 주력이었다. 허위는 1907년 9월 강원 도 원주에서 문경의 이인영을 추대하고 창의한 관동 창의대와 합세하여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서 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산남의진의 경우에도 진 위대의 해산군인 수십 명이 합류하여 훈련과 전술이 강화되었다. ➋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에 호응하다 정환직 부자가 결성한 산남의진은 처음부터 서울 진공을 목표로 하였다. 창의장 정용기가 1907년 음 력 8월 29일 죽장의 입암에서 전사한 뒤, 산남의진 을 재편성한 아버지 정환직은 서울진공작전에 참여 하기 위해 관동지방으로 북상을 시도했다. 영릉의진 을 조직한 신돌석도 일본군의 소위 ‘토벌작전’에 대 응하여 반토벌작전을 벌였다. 동시에 13도창의대진 소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고자 1908년 1월 강원 도 양구로 진출하기도 했다. 문경 출신 이강년의 경 우에도 경상도 · 충청도 · 강원도 일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1907년 12월 말 이인영의 통문을 받고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북상에 실패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하면서 각처 의병부대의 대일항전은 커다란 전 기를 맞이하였다. 2) 후기 의병의 투쟁 ➊ 이강년,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다 이강년부대는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경기도와 강원도를 거쳐 1908년 5월경 경북 북부지역의 봉화 군 서벽리로 진출했다. 그리고 소백산과 태백산, 그 리고 일월산 일원에서 활동하던 백남규 · 김상태 · 변 학기 · 성일현 · 정경태 · 윤국병 · 권용일 등의 의병장을 영입하여 연합의진을 편성하였다. 이강년부대는 1908년 5월 17일 서벽전투, 5월 18 일 내성전투, 6월 4일 재산전투 등을 치르면서 일본 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 뒤 이강년은 강원도를 거쳐 충청도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적하던 중, 7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