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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의 생애와 독립운동 41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개편 후 김 학규는 제3지대 지대장이 되었는 데, 부대 규모는 180여 명에 달했 다. 제3지대는 가장 많은 병력을 보 유한 한국광복군 부대였다. 광복 직 후에는 상해의 한국광복군 총사령 부 주호판사처(駐滬 辦事處) 처장, 만주 심양(瀋陽)의 한국독립당 동북 특별당부 위원장, 임시정부 주화대 표단 동북총판사처 부처장 직을 겸 직하면서 동분서주, 교민들의 관리 와 귀국 업무에 힘을 쏟았다. 그밖 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로 심양 에서 장연민주자위군을 편성하고 중국 동북지역의 한인청년 1천여 명을 모집 훈련시키기도 했다. 해방 정국에서 모두가 김구를 떠난 후에 도 김학규는 끝까지 김구 옆을 지켰 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 되면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을 맡 았던 김학규는 구속되어 고초를 겪 게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혁명군에 투신하다 김학규(金學奎, 1900~1967)가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고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고향인 평안남도 숙천군 서해면 사산리는 독 립운동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바로 일본 육사 출신으로 연해주에서 독 립운동에 앞장섰던 추정(秋汀) 이갑(李甲)이 같은 마을 사람이다. 이갑 의 본명은 이휘선(李彙璿)인데, 그의 둘째형 이휘림(李彙琳)은 일찍이 비 밀결사 신민회에 참가하여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주도한 인물이 다. 이휘림은 1910년 말부터 전개된 신민회의 집단망명에 앞장서게 되 는데, 1911년 김학규 가족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도 이휘림의 망명과 맥 을 같이하고 있다. 김학규가 쓴 『백파(白波) 자서전』 서두에 동향 선배인 이갑의 집안 내력을 열거해 놓음으로써 어려서부터 그들의 영향이 있 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김학규 가족은 1911년 12월 남만주 통화현(通化縣) 이밀(二密)이라 는 곳에 정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만주 이민의 첫발을 디뎠다. 그 가 19세 되던 해, 곧 1919년 3 · 1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김학규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 만주 통화현 이밀에 서 신관식·이화영 등과 더불어 결사대를 조직하고 그 일원으로 활동하 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 고하고 있다. “우리들은 맨주먹을 들고라도 압록강을 건너 조국 땅에 들어가서 왜 적과 더불어 싸워 피를 흘리기로 서로 굳게 약속하고 손가락을 칼로 베 어 피를 내어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라는 혈서를 쓰고 결사대를 조직하고 압록강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결사대의 항일투쟁은 무산되었지만, 이런 일을 겪고 나서 청년 김학 규는 그 해 여름 뜻한바 있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에 는 서로군정서에 소속되어 소대장의 보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20년 일제의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작전’을 겪으면서 서로군정서에서는 한인 교민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일본군과의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