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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향리에서 한학을 이수하던 중 당시 왜의 횡포와 침해가 날로 심하여 가더니 1919년 2월에 마침내 고종황제를 시해하였다. 이를 계기로 온 국민이 분기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공은 이 고장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인산을 다녀온 허상기 지사 등과 의논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다수 제작하여 동년 3월 17일 이원시일에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은 당일 운집한 3백여 군중에 태극기를 배포하고 정오를 기하여 일대시를 감행하였다. 군중은 이원주재소와 왜헌파견분대장(안본이작)와그 수하들을 처단하고 왜주재소를 파괴방화하였다. 이어서 옥천으로 진입 왜헌파견대(분견대장 신진)와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이에 반항하는 왜헌과 교전이 치열하니 이때에 삼연 대전에서 급파된 왜헌증원대와 교전을 하게 되었다. 총검을 든 그들에 공수로 투쟁하니 속수무책으로 반위(反爲) 피체되었다. 공은 온갖 고문과 형고에도 굴함이 없이 항거하시다가 마침내 억울한 형벌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귀가하니 부인 최안사는 왜군헌의 강압이 심하였으며 조국을 잃은 국민이 살아서 무엇하느냐며 후산 고송에 목을 매여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공로를 높이 치하하고 1992년 3월 1일 건국훈장을 추서하였으며 오늘 이곳에 그 공적을 기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