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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기미년 민족대표 독립지 손병희 선생과 32인을 위시 전국민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침략자 일본제국을 타도하자는 사자후같은 전파를 청문하고 희공께서 분기하여 독자적으로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본면 장곡리 장수산 이종영 이종진 이종형 이응수 등에게 은밀히 부탁하길 4월 7일자 대한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하겠으니 이 사발통문을 전면민에게 회람시키도록 지시하고 전미족에게 연락할 방도를 강구하기 위해 희공의 전원에서 야간 밀의 중 일헌과 고등계 형사 등에게 발각되어 즉석에서 체포되고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이종진이 토설하므로 희공은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장수산은 10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기외 이종영 이종진 이종형 이응수 등은 무죄 석방되다. 희공은 형기 후 슬하에 혈육이 없는 관계로 제의 장자 용훈을 입양 인상졸업 후 인천세관에 재직 중 득병사하고 희공은 단기 4288년 12월 24일 졸 묘는 장현리 종산에 가족장으로 안시되다. 그러나 서기 1990년 8월 2일 국가 수용으로 인해 1993년 4월경에 장현2동 군자봉 낙맥하에 이장 안시되다. 묘향은 을좌 신향 공 유 4제 필헌 충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