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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20일경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완용 등 7적을 성토하는 격문과 이등박문 및 각국 영사에게 보내는 글, 그리고 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2회에 걸쳐 작성하여 윤평순(尹平順)으로 하여금 대한매일신보에 게재케 하려 했으나 일경에 모두 압수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달 25일경에는 이근풍·주창룡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용인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거의하고 서울 중서전동에 있는 홍세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다가 피체되었다. 그후 이듬해인 1908년 3월 13일 평리원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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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將 通訓大夫 監役 瑞興金公 鳳基 追慕碑(의병장 통훈대부 감역 서흥김공 봉기 추모비)